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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대


기원전, 샴페인 지역은 로마 제국의 영토 중 일부였습니다. 샴페인에서 처음 와인 생산을 시작한 것은 로마인이었죠 "샴페인 "이라는 이름도 로마의 Campagne(캄파뉴) 평원이라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물론 이 당시 만들어진 와인은 "거품 없는 레드와인 " 이였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고 말해지듯이, 당시 로마인들은 도로를 만들고 확장하는데 샴페인 지역의 "석회암 "를 채굴해 갔습니다. 채굴을 통해 만들어진 백악질의 동굴이 현재 수백 미터 길이에 이르는 "샴페인 셀러 "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세례식의 와인


샴페인의 중심 도시 랭스는 세계 유산의 대성당이 있습니다. 초대 국왕 크로비스1세는 496년 크리스마스에 이 대성당에서 세례식을 올렸습니다. 그 후 19세기에 이르기까지 25명의 역대 프랑스 왕은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진행하게 됩니다. 당시 대관식 파티에서는 샴페인의 레드 와인을 사용하였고 국경을 넘어 프랑스 전 지역에서 샴페인 와인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샴페인의 재래 시장


11세기 샴페인 지방에서는 정기적으로 상인들이 거래할 수 있는 시장이 열렸고 이 시장에서의 거래를 통해 와인 소비를 늘렸으며, 추가적으로 섬유업이 크게 발전합니다. 섬유업으로 많은 돈을 얻게 된 자산가들이, 훗날 샴페인 메종을 일으키게 됩니다. 

 

거품없는 와인의 번영


샴페인의 레드와인은 프랑스 궁정에서도 유행을 하고 부르고뉴 와인과 그 인기를 겨루는 정도였습니다. 우선은 "거품 없는 레드와인"이 샴페인 지방에 번영을 가져온 것입니다.

 

기포의 우연한 발견


처음 샴페인의 발포성 와인을 마신 것은 1660년경 영국인들 이였습니다. 추위로 발효가 멈추어 버린 와인이 영국에 수출됐고 따뜻한 봄을 맞아 다시 발효가 시작되었습니다. 2차 발효를 통해 기포가 생긴 와인은 당시 매우 희귀하였고 뭐든 새롭게 희소성이 있는 것이 유행이던 그 시절 영국인들은 기포가 생긴 샴페인를 유행처럼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돔 페리뇽의 업적


샴페인의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돔 페리뇽은 19세로 수도승이 되었고 1668년 29세로 수도원의 술 창고 담당이 됩니다. 그 후 12년 후 41세 1680년경 샴페인에 기포가 생기는 것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조사하게 되었는데, 추위로 발효가 정지한일반 와인이 온도가 올라가며 2차 발효를 통해 기포가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샴페인은 기포가 있는 와인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샴페인의 아버지


돔 페리뇽은 미각과 후각이 매우 뛰어났으며, 와인을 한 잔 마시면 그것이 어느 밭의 것인지 알아맞힐 수 있었답니다. 돔 페리뇽의 업적은 크게 4가지를 들 수 있는데, 프레스티지 뀌베의 생산, 블렌딩, 코르크의 사용, 수직 압착기의 도입입니다. 당시 기포의 발생은 컨트롤할 수 없어 여러 문제점들이 있었는데 이를 개선하고 발전시키는데 돔 페리뇽의 많은 노력이 들어갔습니다.

 

발포성 와인의 유행


18세기부터 샴페인은 "코르크가 튀어나온 발포성 와인"으로 불리며 프랑스 궁정에서 대유행이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등장인물 퐁파두르 부인도 샴페인을 너무 사랑하여 모든 파티에 수백 병의 샴페인을 주문한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당시에 샴페인은 남성보다는 여성들이 더 즐기는 와인이였습니다. " 여성이 마시고 아름다울 수 있는 술은 오직 샴페인뿐이다 " 퐁파두르 부인의 유명한 말입니다.

 

달콤한 샴페인


프랑스 궁정에서 대유행이 된 샴페인은 사실 "단맛" 이였습니다. 당시의 샹파뉴 양조시 마지막에 첨가하는 도사쥬의 양은 지금의 10배 정도로 아주 많았습니다. 현재의 드라이한 Brut 샴페인은 이후 100년 정도 지난 19세기 중엽의 일입니다.

 

나폴레옹의 샴페인


1789년 프랑스 혁명에 의해서, 샴페인의 애호가들은 귀족에서 혁명가들로 바뀝니다. 그 뒤 프랑스를 통치한 나폴레옹 1세는 황제인 약 10년간 나폴레옹 전쟁이라고 불리는 싸움을 반복했습니다. 평소 샴페인을 좋아했던 나폴레옹은 출정 전에는 반드시 샴페인 지역에 들러 샴페인을 마시고 출발했는데 지금의 모엣 에 헤네시의 주인과 친분이 있었습니다.

 

세계로 퍼져 나가는 샴페인


나폴레옹이 전쟁에 실패 한 후 나폴레옹 전쟁 피해로 혼돈 속의 유럽 국경을 시정하고자 1814년에 개최된 "빈 정상회의"가 열렸는데 이때 프랑스 미식 외교에 사용되었던 술이 샴페인이였습니다. 당시 샴페인을 마셨던 각국의 대표들은 자신의 나라에 돌아가서도 기포가 있는 샴페인을 즐기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유럽 국각에 퍼져 나가게 됩니다.  

 

기술의 진보


샴페인의 발전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술의 진보"입니다. 수작업으로 만들던 샴페인의 구조는 각 분야에서의 기술 혁신이 추진됨으로써 효율적으로 기계화되어 갔으며 품질도 향상됩니다. 특히 1818년 뵈브 클리코가 고안한 "퓨피트르"의 등장은 샴페인 양조에 있어서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침전물이 없는 깨끗한 샴페인의 양산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1844년 자크송이 코르크를 고정하는 철사, 뮤즐레를 발명하였고 이 시대,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운 시대가 찾아 옮으로써 기술의 진보와 함께 샴페인의 황금시대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고난의 시기


그런 샴페인의 번영에도 재앙이 닥쳤는데. 1914년에 발발한 제 1차 세계 대전, 필록세라의 피해, 세계 공황 등 샴페인에게도 고난이 번집니다. 첫 번째 고난이 거의 회복되려던 차 제 2차 세계 대전은 포도밭을 황폐화 시켰고 독일군에게 몰수 되어 갔습니다. 샴페인의 사람들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샴페인을 지키려고 합니다. 이 쓰라린 시대, 샴페인에 있어서 밝은 일이라면 1927년 최초의 AOC 법이 제정된 것입니다.

 

새로운 도약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돌아오면서 샴페인은 다시 도약했습니다. 영국이나 미국 등 해외 수출의 급증, 세계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일반 사람들에게도 샹파뉴가 널리 알려졌던 것입니다. 수도원에서 태어났으며 프랑스 궁정에 사랑받고 자란 샴페인은 귀족들이 사라지고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다음 시대의 사람들 속에서 씩씩하게 살아가고 완전히 성숙하고 오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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